2017  년 12  월 16일

통권 제 387호 2014년6월[3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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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이야기 - 박소현┃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
   망국의 한을 안은 가야산, 폐사지 이야기

 
《나의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문화유산 답사코스에도 급수가 있는데, 그 최고과정은 절도 스님도 없는 폐사지 답사다.” 이 말은 답사의 고급자일수록 그 연륜을 말해주는 폐사지의 고즈넉한 정취 속에서 최고의 행복감을 맛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옛 절터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쩌면 한국 문화사의 한 축을 연결하는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가야산에는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법보종찰 해인사가 자리 잡고 있다. 누구든 가야산을 이야기 하면 해인사를 떠올리고, 해인사를 말하면 가야산을 떠 올린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번뇌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가야산 해인사를 찾게 된다. 우리 선조들 역시 부처님을 모신 사찰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덜고 불법을 닦으려 한 행동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해인사 홍제암을 지나 산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걷다 보면 작
은 능선위에 규모가 꽤 컸을 것으로 보이는 사찰의 흔적이 남
아있다. 이곳은 사찰의 위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석축과 계단
의 흔적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어, 사찰의 규모를 실감나게
한다.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대사의 훌륭한 행실을 기록한 최
치원의 《석순응전釋順應傳》에 의하면 이 사찰의 이름은 “거
덕사擧德寺”라고 전하고 있어 그 역사성을 증명한다. 또한 재
미있는 점은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월광태자가 처음으로 불연
 
佛緣을 맺은 곳이 이곳이라 전한다.
대가야는 가야산의 여신인 정견모주의 첫째아들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세운 나라로 현재의 고령 지역이다. 그의 9세손인 월광태자는 대가야와 신라와의 혼인 동맹에 의해 태어난 대가야의 왕자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동맹관계가 깨지면서 대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562년) 그 후 월광태자는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건국 시조의 정기가 서린 가야산으로 은거하여 살았던 듯하다. 이때 월광태자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곳이 거덕사였으며, 월광태자는 이곳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가야산 산자락 아래에 있는 성주 법수사지에도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려하자 이를 반대한 태자는 울며 반대하다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삼베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麻衣태자라고 불린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마의태자의 아우가 범공 스님인데, 일연이 쓴《삼국유사》에 의하면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과 채식으로 한 세상을 마쳤고, 계자季子는 머리를 깍고 화엄종에 드나들면서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라고 전하는데, 해인사와 법수사에 머물면서 불법을 닦았다고 한다.

이렇듯 가야산에는 불교가 유입된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불
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해인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 및 암자들이 가야산 전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조선시대 가야산을 유람한 선
비들의 문집에 남긴 유람기, 시 등을 통해 오늘날 그 흔적을
찾기 힘든 사찰의 유허지도 여전히 기록 속에서 찾아 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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