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년 8  월 23일

통권 제 387호 2014년6월[388호]
  호계삼소
거창 죽림정사 주지 일광 스님
  원제스님의 세계 만행
리우에서 만난 예수
  영지影池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보리의 세상 바라보기
내 역할
  보장천추寶藏千秋
석문石文의 명품 최치원 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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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스님의 기사로 재직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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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진주 의곡사 가사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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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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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影池 - 김선주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초록향이 마중에 나선 북한산의 유혹에 이끌려 그들의 이야기에 홀연히 빠져든다. 바람과 숲의 대화에 느닷없이 끼어들어도 자연은 시비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상냥하게 받아 준다. 자리가 좁으면 줄기를 키워 서로에게 공간을 나눌 뿐, 햇볕이 적다고 투덜대거나 시샘하지도 않는다.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도 않는 그들을 통해 나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산을 오른다는 건, 경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임을 무언의 가르침으로 일깨운다. 옷깃을 헤집고 살갑게 날아드는 바람 한 점에, 욕심 자락 실어 보내고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으로 승가사 백운교 계단을 오른다.

서울 북한산 비봉 동쪽에 자리 잡은 승가사는 신라 756(경덕
왕)년 수태秀台 스님이 창건하였다. 바위를 뚫어 굴을 파고.
돌을 쪼아 승가 대사의 석상을 봉안하여 승가굴이라 불리었다.
승가 대사는 서역에서 당나라로 건너와 신이한 법력으로 중생
을 교화하여 생불로 칭송되었던 선사이다. 승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과 중생구제 원력에 감화되어 사찰의 명칭도 승가사僧伽
寺라 하였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역대의 왕들이 행차하여 참
배하였으며, 찬란한 역사만큼이나 빼어난 풍광을 지닌 승가사
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머무르며 절경을 노래하는 시와 글들
을 남겨 놓았다.
 

승가사 선원은 비구니 스님들을 제접하고 법을 인가하여, 비구니 교단을 되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만공 선사의 선맥과 한국 비구니계를 새롭게 일군 법희 스님의 선풍이 살아있는 도량이다. 법희 스님은 만공 선사의 법을 인가 받아 비구니 선맥에 주춧돌을 놓았으며, 가장 큰 줄기를 키워낸 거목이다. 스승을 찾아 덕숭산 정혜사에 들어서자 만공 선사가 맨발로 달려 나와 ‘내가 이런 수좌 올 줄 알았다’며 걸망을 받아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놓아버리고 수행에만 몰입한 법희 스님은 춘성 금오 전강 경봉 향곡 고봉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법력을 칭송하였으나, 말과 글을 남기지 않았던 비구니계의 전설적인 스님이다.

승가사 선원은 1935년 만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1명의 납자가 안거에 들어 선원 문을 열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폐쇄 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 비구니 선객들이 모여 정진하면서 선원의 모습이 다시 갖추어 졌다. 1971년 주지로 취임한 상륜 스님의 중창불사로 적묵당 선방이 신설되었으며, 이때부터 더욱 활기를 띄어,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1972년 하안거에는 춘성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60명의 선객이 수행정진 하였으며, 이후 벽초 원담 숭산 스님 등을 조실로 모시고 용맹정진의 푸른 선기를 이어왔다. 1988년 삼각산 제일선원第一禪院으로 명칭을 바꾸어 수행 가풍을 진작시키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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