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년 5  월 23일

통권 제 311호 2008년2월[312호] 통권 제 313호
  선우정담善雨情談
나한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
문수가 세존의 입을 막으니
  유마의 방
새해 벽두, 불경한 부담浮談 ..
  이달의 이야기
시작하는 마음
  이달의 이야기
송구영신
  이달의 이야기
미국에서 맞이한 새해
  화엄삼매華嚴三昧
선재동자 구도의 길
  영지影池
부산 명지사
  동화서도東話西道
섬 속의 섬, 인간의 치부
  호계삼소
칠곡 화성사 주지 종묵스님
 ▶ 다음목록

   선우정담善雨情談 - 김선우
   나한

 
한 달 전 떠나온 그곳에 흰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오전 아홉시만 되어도 햇살 속이 아주 따끈해지는 남국에 있습니다. 이곳은 정오가 되면 너무 뜨거워져 그늘을 찾아 쉬어야 하는 날씨입니다. 남국에서 설야의 당신을 상상합니다. 흰 눈 속에 고요한 나무들과 여릿한 뭇 생명들의 숨결 같은걸 떠올립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거처에서 가까운 신축 건물 공사장 모래더미 위에서 자그맣고 새까만 몸피의 아이들 셋이 장난을 치는 걸 바라봅니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장난감이라곤 모래더미가 전부인데도 저토록 천진하게 까르륵 거리는 아이들이 신기합니다. 벽돌을 지고 나르며 이방인의 출현을 곁눈질하던 아이들의 부모도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주었습니다. 웃음 뒤에 있는 그들의 등뼈는 고된 노동으로 휘청거렸지만 웃음을 짓는 짧은 한 순간만큼은 극적이라 할 만큼 천진한, 아,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들은 거의 언제나 신비에 가까운 모순입니다. 나를 향해 함박눈처럼 웃는 네 살배기 시와니는 좋지 못한 영양 상태로 아주 바싹 말라 있지만 그 아이의 웃음은 내 마음의 바삭거리는 모든 부분을 적시고도 남을 만큼 습윤합니다. 시와니의 부모가 생애 꼭 한번 순례하고 싶어 하는 갠지즈는 이곳에서 너무도 멀리 있지만 시와니의 웃음 속에 성스러운 어머니 강이 이미 흐르고 있음을 시와니의 부모들도 알고 있을까요.

오늘은 아름다운 사람 비노바 바베를 생각하며 한나절을 걸었
습니다. 비노바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상주의자들 중 가장
못 말리는 이상주의자 중 한 명입니다. 이상을 꿈꾸고 추구하
지만 그의 두 발은 뜨거운 대지와 함께였으니 강인한 실천가였
 
고, 사회에 결속되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홀로의 시간을 누리며 자기 내면의 음성을 탐구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이니 성속이 분리되지 않은 구도자였습니다. 간디의 제자이면서 간디가 존경을 표한 사람이기도 한 비노바는 간디와 함께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었지요. 그의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을 처음 알게 되었을때 나를 흔들었던 전율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도둑질은 범죄지만 많은 돈을 쌓아놓는 것은 도둑을 만들어내는 더 큰 도둑질입니다. 당신이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면 땅 없는 가난한 이들을 여섯째 자식으로 생각하고 그를 위해 소유한 땅의 6분의 1을 바치십시오.”

세상에! 소유가 미덕인 물욕의 세상에 부자들이 들으면 소가 웃을 얘기인 이런말도 안되는 호소를 하며 비노바는 인도전역을 맨발로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맨발의 비노바는 스코틀랜드 규모의 거대한 토지를 헌납 받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눕니다. 그의 맨발은 큰 슬픔과 큰 자비가 세상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발자국을 가졌습니다.

문득 입을 열어‘아라한’이라고 발음해봅니다. 아라한은 열
반에 들지 않고 세상의 고통 속에 남는 자. 절집에서 흔히 보
는 나한상들이 오늘 햇볕 쨍쨍한 거리에 가득합니다. 시와니는
해맑게 웃고, 나는 시와니의 새까만 맨발에서 비노바와 당신
의 맨발을 모두 느낍니다. 도처에 나한이니 세상의 고통이여
햇빛속으로 풀바구니를 들고 가소서. 뜻 모를 말을 또 중얼
거립니다.□

 
 
    이전페이지

매우좋다 좋다 보통 그저그렇다 좋지않다
    친구에게 추천하기
 
다음페이지  


의견글이 없습니다.
 

해인지는 | 연혁 | 인사말 | 편집위원 | Site Map | Contact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