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년 4  월 27일

통권 제 193호 1998년4월[194호] 통권 제 1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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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권적축 - 원철
   나의 혀는 타지 않으리

 
구마라집은 전형적인 서역인이었다
역경사적譯經史的 관점에서 전형적인 서역인으로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구마라집鴻摩羅什일 것이다. 그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국가인 쿠차(龜慧國)의 왕족 출신으로 인도의 유학 과정을 통하여 대소승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였고, 뒷날 중국 장안長安에서 불경의 한역을 주도한 대역경가이다. 인도와 중국의 매개자로서 서역 출신인 그는 역경의 더 없는 적격자로서 그 몫을 다하였다.

모친에게서 역경을 하라는 부촉을 받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다원과를 얻은 비구니 스님인 어머니에게
서 영재 교육을 받았다. 모친의 감독 아래 끊임없이 경전을 암
기해야 했다. 어린 그의 학문 진보에는 어머니 기바耆婆스님도
놀랄 지경이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어느 지방에서 아주 큰
발우를 발견하고는 신기한 마음에 들고서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나서는 한 생각을 일으켰다. “발우는 이렇게 큰데 어
째서 이다지도 가벼울까” 라고 생각한 순간 무거워서 이고 있
을 수가 없었다. 영겁 결에 소리를 지르면서 내려놓았다. 이에
어머니는 그 까닭을 “너의 마음 속에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
났기 때문에 발우의 가볍고 무거움이 생겼을 뿐이다” 라고 설
명해 주었다. 어머니는 일곱 살인 아들까지 출가시켜 아홉 살
에 인도의 계빈국(캐시미르)으로 유학을 보낼 때 함께 따라갔
다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같이 귀국한 선지식인 동시에 도반이
었다. 구마라집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다시 인도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모자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그는 아들에게
이런 당부를 한다. ꡐ방등方等의 깊은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어떻게 전하는 일은 오직 너의 힘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만은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자 이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살의 길은 타인을 이롭게 하고 자신의 일은 잊을 따름입니다. 만일에 큰 법을 전할 수 있어 진리에 어두운 어리석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저의 몸은 뜨거운 가마에서 불에 타는 고통을 받아도 한이 없습니다?”

중국어를 십칠 년 동안 익히다
인도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이미 서역 불교를 대표하는 유명한 인물로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은 이내 화근으로 변했다. 고국에 그 때문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전진前奏의 왕인 부견符堅(338~385)은 쿠차지방에 칠만명의 병력을 보내어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전쟁은 덕을 갖춘 사람을 초청하기 위한 것이다. 짐이 듣건데 서역에 구마라집이라는 인물이 있어 불교의 진리에 정통하여 후학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어진 사람은 나라의 큰 보물이다. 쿠차를 쳐서 구마라집을 초청해 오기 바란다.”
총사령관은 여광呂光이었다. 쿠차는 이내 정복당했고 구마라집
은 포로가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살이었다. 그러나 여광
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본국이 망해 버린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여광은 고장姑藏 지방에다가 터를 잡고 후량後凉을 건
국했다. 그러나 그 나라 역시 내부의 혼란이 겹쳤다. 그런 가
운데 구마라집은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착실히 중국어를 익히
면서 사상적 체계를 함께 가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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