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년 10  월 18일

통권 제 387호 2014년6월[388호]
  호계삼소
거창 죽림정사 주지 일광 스님
  원제스님의 세계 만행
리우에서 만난 예수
  영지影池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보리의 세상 바라보기
내 역할
  보장천추寶藏千秋
석문石文의 명품 최치원 차운..
  해인선우海印善友
방장스님의 기사로 재직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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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진주 의곡사 가사불사
  학사대
일본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해인리포트
6월은 평화의 달, “남북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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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선우海印善友 - 무구
   방장스님의 기사로 재직하시는 성계웅 님

 
는데 그곳 스님이 식은밥에 짠지를 내어주시더라구요.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것도 어찌나 고마웠던지 나오면서도 인사를 몇 번이나 했어요. 한번은 지리산 영원사에 감사를 갔을 때예요. 매해 걸어서 다녔거든요. 재무스님과 당시 권부현 씨가 사무장이었을 때. 새벽 어두컴컴할 때여서 영문도 모른 채 갔죠. 왠지 길이 푹푹 빠지는 거예요. 밤에 내려왔는데.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손에는 몽둥이나 빗자루 같은 걸 들고. 새벽 지나왔던 길이 전날 밤에 막 도로포장을 해서 채 마르지 않은 길이었던 거죠. 마을의 숙원사업이었는데 그 포장도로를 세 사람이 엉망으로 만들어놨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웃음) 그래서 마을사람들과 합의를 봐서 재정비하는 데 2, 30만원을 드리고, 막걸리 두세 말을 받아드리기로 했죠. 뒷꼭지에 대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싶어 얼른 빠져나 왔는데, 사무장이 감사서류를 두고 와서 다시 찾으러 갔다가 애먹었죠.(웃음)

80년대 중반 농지개량사업을 했죠. 농지개량조합에서 해인사 경지정리작업을 해준다고 해서. 흩어졌던 해인사 땅을 모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마을사람들과 협상을 해야 했어요. 현재 홍제암에 계시는 종성 스님께서 매일 저녁에 마을에 내려가서 협상을 하셨죠. 많이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방장스님께서 주지소임을 보실 때 해인사 토지전산화 작업을 하셨는데 지금 해인사 토지관리에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보람을 들려주신다면.

마장동, 초막골에 대체식수를 했거든요. 손가락만 큼 작은 나무를 심었는데 지금 아름드리 숲을 이루고 있잖아요. 기분이 좋죠. 그리고 지금의 청화당 자리가 옛날에 방앗간이 있었죠. 명진 스님이 계실 때 방앗간을 허물고 청화당을 지었거든요. 겨우내 지게차로 석축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어떤 문화재위원이 그 석축을 보고 문화재라고 하니까, 속으로 웃었죠.

해인사의 종무원으로서 수십여 년을 함께해 오시면서 아쉬운 점과 바람들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때 직원들 복지차원에서 해인사에서 임대해주는 식당이나 불
교용품판매점이 있었죠. 적은 보시금이지만 도움이 컸죠. 지금
은 유명무실해져서. 저는 그 혜택을 받았지만 현재 40대 종무
원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됐죠. 가정을 꾸려나가기가 많이 힘들
겁니다. 자녀를 대학교에 보내려면 맞벌이를 해도 빠듯하죠.
등록금 천만원시대잖아요. 최소한 최저임금제라도 보장해 줘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합동매표소를 하던 때였는데, 해인사
와 가야산국립공원 직원들이 함께 일을 했어요. 월급 차는 4,
5배 정도.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허탈했죠. 당시 원택 스님께
서 총무국장으로 계실 때 이런 격차를 줄여보겠다고 하셨는데,
잘 안 됐죠. 현실적 여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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