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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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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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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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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응
   대승과 소승

말을 아끼는 집안의 가풍(家風)에 젖어 살다 보니, 사제님과는 평소에도 늘상 오고가며 만나곤 하지만 이렇다 할 따스한 인삿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이 참 겸연쩍은 일입니다. 옛말에 선비는 사흘이라도 서로 보지 못하다가 만나면 눈을 부비고 자세히 상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했다는데, 하물며 우리는 명색이 하루하루를 남모르는 정진력으로 일취월장 자신을 향상시켜야 하는 구도의 과정에 있는 수도승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도 수행자들이 서로 만나 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항상 진리에 대해 토론하고 탁마하기를 게을리 말라 하셨는데 자신의 부족하고 명확하지 못함을 ‘유마의 침묵’을 빙자하여 꿀먹은 벙어리 모양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있으니, 생각하면 식은땀 나는 노릇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제님이 불문(佛門)에 들어온 지도 꽤 여러해가 되었군요. 부처님 경전도 어느 정도 열람한 터이고, 한사람의 출자사문으로서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립했을 때라 생각됩니다. 그래, 중노릇은 할만 한가요? 하기사 이젠 ‘첫 보리심을 내는 순간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말 정도는 아무 부담없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보리심을 과연 내기는 내었읍니까? 진리의 북을 올리는 데는 앞섬과 뒤섬의 우열이 없다 했으니 사제님과 나도 선후배를 떠나서 기탄없이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왕 우리가 평소 못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이렇게 편지로나마 하게 되었으니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마음 설레입니다.
먼저 생각난 김에, 지난번 사제님이 여행중에 고등학생에게
서 대승과 소승의 구분을 해달라는 질문을 받고 아는대로 일러
주었는데도 그리 썩 시원하게 느끼는 것 같지 않아 안타까웠다
 
고 했으니, 차제에 대승과 소승의 문제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면 어떻겠읍니까? 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중요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만…….
무엇이 대승(大乘)이며 무엇이 소승(小乘)일까? 우선 대승이라면 큰 수레 소승은 작은 수레로 번역될 터이고, 그래서 대승불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면, 소승불교는 한 사람밖에 타고갈 수없는 가르침 - 하기사 대승의 관점에서 보면 소승의 가르침은 자기 한몸조차 구하지 못 한다지만 - 이라고 상식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남방불교(태국, 스리랑카, 미얀마등)는 소승이고 북방불교(한국, 중국, 일본 등)는 대승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읍니다. 아무튼 교리로 보나 교단 발달사로 보나 대승과 소승을 구분짓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런 통상적인 구분으로는 어쩐지 속시원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노상 있읍니다. 또 한국불교를 대승불교권으로 분류하고는 있는데, 글쎄, 한국불교의 어떤 점을 보고 대승이라할 수 있는지 조금은 회의하는 처지이다 보니,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시 한번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어떨지 한번 감정해 보길 바랍니다.
대승이란 방면바라밀을 구비한 것이고, 소승이란 그렇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곧, 자전거를 두고 이야기할 때 두 개의 바퀴가 쓰러지지 않고 설 수 있는 역학적인 균형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이라든지 그것을 몸으로 습득하여 운전할수 있게 되는 일은 여전히 소승일 터이고, 그 자전거를 타고 어떤 목적과 목표를 세워 부산이나 또는 서울로 운전해가는 일은 대승일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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