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검색 > 카테고리 >
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현응
대승과 소승
 현응
무심시도(無心是道)
 현응
확연무성(廓然無聖)
 현응
색즉시공 공즉시색
 현응
윤회와 해탈
 현응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현응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현응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현응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1 [2]

   - 현응
   확연무성(廓然無聖)

해제(解制)를 하여 스님들은 행각(行脚) 길에 나서버리고 산사(山寺)는 이른 봄의 적정에 잠겨버렸읍니다. 모처럼 한가로움에 겨워 뜨락도 거닐어보고 이 방 저 방 기웃거려도 보았읍니다. 방모퉁이에 차곡이 개어져 있는 좌선하던 방석이나 정갈히 접어둔 경전 갈피를 접할 땐 새삼 지난 겨울의 뜨겁던 구도의 열기를 느낄 수 있어 전장(戰場)을 돌아다보는 오싹함을 느꼈읍니다. 스님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한 겨울을 애썼으며 또 무엇을 찾아 길을 나섰을까요?
보통 수행하는 납승을 ‘마음 찾는 나그니’,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 하지요. 또는 ‘부처를 구하고 성인을 이루려는 사람’ 이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 쾌락, 그밖의 ‘사회적 성공’을 부질없이 여기고 좀더 청빈하고 순결한 생활 속에서 무언가 ‘고매한 이상’을 추구합니다. ‘고매한 이상’ 이란 ‘부처의 경지’, ‘열반의 경지’, ‘깨달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쉽게 감내하고 적응할 수 없는 이러한 특수 생활로 말미암아 승려들은 이 사회에서 특정한 대우 내지는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편지에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우리 승려들은 노
상 접하는 환경이 사찰 공간이고 대하는 사람이 같은 승려나
신도들이기 때문에 사회나 역사속에서의 나의 삶과 우리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데는 자칫 부족함이 있을 수있읍니
다.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도 우리 사이에서만 편리하게
통용되는 불교 언어에 익숙해 있는 실정입니다. 불교 용어야
말로 한편으로 살펴보면 기존 사회의 말과는 달리 특수한 사상
이나 이념에 근거하고 심하게는 경도되는 한계성을 벗어나 삶
 
의 문제를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창출된 논리적 언어가 아니겠읍니까? 그러나 이천년 이상을 내려오는 동안 엄밀한 불교 용어도 점점 고착화 되고 전도되며 심하게는 절대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사고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사고는 사용하는 언어를 온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바로 언어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언어라는 것이 일상의 언어까지를 포함하여 불교적 언어가 사고와 논리의 중심적 축을 이룬다 할 때 우리는 불교 용어를 너무 안일하게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부처님의 연기관(緣起觀: 변화와 관계성)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불교 언어까지도 절대화되고 고정화될 수 없음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다른 불교 언어도 그러하지만 특히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 때문에 경솔히 말 불이기도 어려운 ‘부처’ ‘깨달음’, ‘진리(法)’라는 말까지도 절대화시키거나 신비화시켜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지요?
‘무엇이 으뜸가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에 스님은 ‘성스러운 진리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廓然無聖)’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아니 진리가 없다니 그러한 성스러운 진리가 없다면 우리는 수행을 할 필요가 어디 있으며 왜 출가를 했단 말입니까? 사제님. 우리는 여기서 한 호흡 가다듬고 불교의 진면목을 보이는 달마스님의 이 말씀에 귀기울여야만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각성을 주어 관행적인 의식을 떨치도록 해주는 반어적(反語的)인 가르침이 아닐까라고 생각할수도 있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해인지는 | 연혁 | 인사말 | 편집위원 | Site Map | Contact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