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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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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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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응
   윤회와 해탈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자는 뿌리를 봄비로 일깨운다. 지난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마른 구근(球根)을 가진 작은 생명을 길러 주며……
-티 에스 엘리어트의 황무지 중에서

또 한번 계절이 바뀌고 지난 해의 추억과 새봄의 전망 앞에 섰읍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봄은 아름다운 탄식과 셀레임뿐만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의 빛으로도 다가왔읍니다. 비어 있는 벅찬 한해 앞에서 새 생명의 환희와 무럭무럭 샘솟는 욕망으로 몸이 자지러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난 겨울의 안락했던 잠과 또 준비를 핑계 대고 취한 휴식이 이제 떨칠 수 없는 익숙한 유혹이 되어 새로운 창조적 삶에의 도전 앞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끝없는 침잠으로 잠기기도 합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하는 탄생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점철로 이어지는 윤회의 과정 속에 있는 우리 삶의 비극성은 태고부터의 중대한 문제였으며, 불교 가르침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삶의 비극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좌절과 죽음의 경험이 단연 그것의 주요한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삶 주변의 모습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철마다 해마다 바뀌어져 갑니다. 인생도 길게 잡아 칠십년이면 생을 마감하며, 그 사이의 성패와 영고성쇠도 무상합니다.
사제님도 동의할 줄 압니다만 나는 윤회라는 것을 비단 어떤
사람이 철십년쯤을 살고는 죽고 그리고는 다시 태어나고 하는
식의(심지어는 개로도 태어나고, 새로도 태어나는), 계속되는
생명의 쳇바퀴 현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염불 구절에도 나
 
오는 바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이 아니겠읍니까? 즉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말합니다.
가끔 신도들이 이렇게 묻기도 하지요.

“삶들이 윤회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짐승으로도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현대인들에겐 매우 쉽게 다가오지만, 윤회의 문제만큼은 증명이 잘 되지 않아 의문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들을 느끼지만, 이것은 사실 불교의
가르침을 잘못 아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희란 말은 본디 불교의 고유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
교 이전의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에서부터 진작에 이야기되던
것이었으며, B.C.6세기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사상이었습니다. 즉 “생명은 한번 죽음으로써
그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는 재생을 하게 된다”는 것
이지요. 그렇지만 식량과 일용품의 생산이 부족하고 사회 체제
가 불합리하게 짜여져 있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사람
들에게는 삶이란 괴로움의 나날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삶도 그
러하지만 그 어떤 형태의 재생도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았읍
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현재의 삶도 되도록 원만히 마감하기를
바랐지만 그와 함께 더이상의 재생도 원하지 않게 된 것입니
다. 이런 생각은 윤회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해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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