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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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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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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응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II

대도무문(大道無門)
사제님, 비상한 시대에는 비상한 사상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생각 체제를 아무리 고양하더라도 결코 새 생각에 도달할 수 없읍니다. 새생각, 새행동은 결코 옛생각, 옛행동이 진보한 결과가 아니라 혁명적인 창조 및 전환의 결과입니다. 재차 강조할 점은 깨달음(돈오)을 대상적인 어떤 세계나 경지를 터득한 주관적인 심리적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이원론적 입장으로서 깨달음을 통상적인 인식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존재와 인식의 분리할 수 없는 역동적 구조를 체득하는 일로서 정진적인 절차가 아닌 혁명적 전환으로 대상존재의 차원이거나 인식주관만의 차원이 아닌, 그 둘의 종합적인 세계를 맞는 일입니다. 또한 이는 앎과 행동의 선후 관계가 아닌,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체현을 뜻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혁명성을 이해하기 위해 혜능스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스님은 오늘날 선종의 실질적 종조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을 보다 구체화시킨 장본인입니다. 스님은 수행을 점진적 노력이라고 주장하는 동료의 시에 반박하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스승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혁명적) 못은 바로 진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바탕
언제나 갈고 닦아서
먼지 하나 묻히지 마세 -신수스님
 
(점진적) 진리의 나무란 본디 없는 것이며
맑은 거울 또한 무슨 바탕이 아니로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어떠한 실재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묻으랴 -혜능스님
신수스님은 깨달음을 점진적인 노력의 소산으로 보는 반면, 혜능스님은 ‘맑은 거울’이나 ‘진리’로 상징되는 인식의 체계나 진리를 보는 기준까지도 고정화하여 상징하지 않는 철저한 공(空)의 입장에 서서 깨달음에 들어서는 길이 점진적인 절차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읍니다. 즉 먼지 자체가 실재가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고 먼지가 끼게 되는 그 어떤 바탕 그것조차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위에 나타나는 먼지의 문제는 자연 해결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안경에 묻은 색이나 먼지를 닦아내면 무엇하느냐? 무색투명의 안경이 되더라도 사족이다. 왜 하필 안경을 써야 된다는(사물을 ‘어떤 기준’이나 ‘어떤 논리 체계’로서 비춰본다는 식의) 생각을 하느냐? 어떠한 안경도 벗어 버리자, 부쉬 버리자, 이것이 혜능스님의 “본래 한 물꼬도 없다”는 말씀의 요점이지요.
이러한 혜능스님의 혁명적 가풍은 그의 후학인 혜해스님에 의해 ‘돈(頓)이란 단박에 모든 잘못된 견해를 철폐하는 것이며, 오(悟)란 어떤 논리나 내용의 실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頓除妄念 悟無所得.”는 명쾌한 해석을 거쳐, 송(宋)때의 혜개스님의 “진리에 들어서는 문은 없다 大道無門.”라는 역설적 명제에 이르러 그 극치를 이룹니다.
“진리에 들어서는 문은 없다”는 말은 진리에 들어가는 ‘
방법’ 이 없다는 뜻으로 어떠한 노력이나 수행도 진리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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