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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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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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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응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Ⅲ

깨달음과 역사
이제 깨달음을 이야기함에 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만 두 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만, 한 스님은 참선수행하는 수좌스님이고 한 스님은 사회 일선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스님이었습니다. 수좌스님이 말했읍니다.
“왜 요즘 깨달은 사람은 예전의 깨달은 사람에 비해 열등한가? 왜 요즘 깨달은 사람은 자유자재로 신통(초능력)을 구사하지도 못하고 병이 들기도하는 등,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요즘의 수행법이 틀렸다는 말인가? 하루빨리 예전 선지식처럼 큰 깨달음과 능력을 얻어 괴로움의 중생계를 제도해야 할텐데…”
포교사스님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깨달음이란 관념적이거나 개인적인 일신상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개인에게서도 성스러운 인격과 실천을 겸비함은 물론 사회적 제 문제의 해결과 정토사회의 건설까지도 싸안아 성취해야만 진정한 깨달음이요 성불인 것이다. 따라서 나의 포교활동은 깨닫고 난 뒤의 봉사활동이 아니며, 나의 사회적 실천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도의 과정인 것이다.”
두 스님의 이야기는 모두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된 진지한 구도의 자세를 보이고 있읍니다. 그러나 두 스님의 생각엔 저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깨달음이란 두 스님의 이야기처럼 일신상의 많은 능력을 갖
게 된다거나 사회적 과제의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
역시 어려서 처음 출가했을 적에는 깨달은 사람은 초인적인 능
 
력을 얻게 되어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내다볼 수 있고 물위를 걷고 하늘을 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불교에는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와 민족 등의 모든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원리와 법칙,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방식이 있다고 믿었읍니다. 다만 내가 아직 어리석어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또 그것을 시대의 추이에 맞게 새롭게 조명해 내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불교인들이 한번씩 가질 법한 것이지요. 그밖에 사회의 문제에 좀더 첨예한 관심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진보적인 불교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좀더 불교의 교리와 정신을 기본적인 바탕으로 삼은 것이어야 하지 않나 하고 내심 반성하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껏 실천의 장 선두에서 내달리
다가도, 마치 늘어난 고무줄이 원점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것처럼, ‘불교’라는 틀 속으로 후퇴하곤 하거나 아니면 뒤돌며 주춤거리곤 하였지요. 그와 반대로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불교인들은 이런 진보적인 불교인들의 사회 참여와 실천을 비불교적이라고 비판하는 경향도 있었읍니다.
하지만, 사제님, 그 어느때인가 나는 이러한 여러 가지 유형의 생각들이 ‘깨달음’과 ‘역사’의 문제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깨달음의세계’와 ‘역시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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