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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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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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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응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IV

돈오점수설, 돈오돈수설에 대해
이제 ‘혁명적 깨달음(돈오) ’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끝으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혼돈이라 생각되는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 에 대해 지적할까 합니다. 특히 아직 수행의 시작에 있는 사제님이 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바로 앞 편지 ‘깨달음과 역사’ 편과 그 내용이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난 편지가 주로 사회 역사 속에서의 실천적 삶의 모습과 불교적 깨달음의 상관성을 말했다면, 오늘 이야기는 깨달음을 구하고 도를 닦는 일, 곧 구도적 차원에 관한 것이라 하겠읍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불교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바로 ‘돈오점수설’ 이었읍니다. 이 점은 사제님도 이력 과정에서나 평소 참선하는 중에서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선 ‘돈오점수설’은 ‘깨달음(보디)’ 과 ‘역사(사트바)
’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논리적 차이를 혼동한 수행법이란 점
을 거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지난 편지에서도 거
듭 말한 바지만, 이 둘의 논리적 차이란 한 마디로 비유해 말
하면 ‘ 역사의 영역’ 이란, 어떤 것을 붉은 것이다 푸른 것
이다, 또는 붉게 만들어가야 한다 푸르게 만들어가야 한다거나
, 그렇지 않으면 이러저러하게 꾸려나가는 일의 차원이라 한다
면, ‘깨달음의 영역’ 이란 어떤 것이라는 명사화된 그 것이
실재가 아님을, 변화와 관계성 속에 노정되어 있는 가설적(假)
이며 환상적(幻)인 것임을 통찰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
떤 것이 실재가 아님을 이해하는 ‘깨달음’의 문제와 그 어떤
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내용을 담아가는가하는 ‘역사적(현
 
상적)’ 문제는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살펴봅시다. 다음은 대략 간추려 본 ‘돈오점수설’의 요지입니다.

어린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 구실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문제도 처음 삶의 본성을 깨닫고 난 뒤에도 여전히 미세한 번뇌와 버릇이 남아 있고 신통의 능력도 아직 구사할 수 없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노력과 수행을 해야만 ‘완전한 깨달음’ 내지는 ‘최고의 성인’을 이룰 수 있다.

다분히 개인의 일신상의 문제로 국한되어 말해지는 이러한 주장은 그 소승적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점은 일단 접어둡시다.
먼저, 본성을 깨닫고 난 뒤에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외적인
능력과 완벽한 인격을 갖추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는데, 이러
한 견해의 이면에는, ‘깨달음이란 어떤 내용이나 실재를 수용
하는 것이 아님(悟無所得)’을 알지 못하고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을 어떤 형태의 실재(法)로서 이해하여 수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깨달음을 그 어떤 것(
본성이라 표현하는)의 실재성을 타파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
고 그 것(본성)을 ‘푸른 것’이나 ‘붉은 것’따위로 이해하
는 차원으로 전락시킨 것이 되며, 또 이러한 이해의 바탕이라
면 이어지는 점진적 수행이란 것도 붉은 삼층집이나 2층집을
짓는 식이며 푸른 삼층집이나 푸른 2층 누각을 짓는 것과 같은
문제로 귀착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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