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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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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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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응
   무심시도(無心是道)

아가기 일쑤인 수행 풍토에서, 무심이란 적극적인 활동이며 꽉 차 있으면서 특정한 견해로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통하게 하려면 우리는 불교를 처음부터 새롭게 이해해야 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모든 일을 멈추고 쉬어서 어떤 일에도 마음쓰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선(禪)의 종장(宗匠)이신 대혜스님 같은 분은 평생을 두고 비판했거니와, 진정한 무심의 수행은 철저히 비판적이고도 치열한 구도심으로 불타올라야 하리라 봅니다. 중요한 것은 고정되고 폐쇄되고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부터 열려 있고 머무름 없는 태도를 가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열려있고 머무르지 않는다 하여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특정한 입장을 띠지도 않으며, 어떠한 견해나 가치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상대주의적인 입장에 빠지게 되면, 그 또한 옛스님들이 경계한, 공(空)에 떨어지는 일로서 삶의 생명을 압살당하고 역사로부터 소외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심의 도’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이를테면 살아가는 현장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해 나가지만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고착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갖거나 또는 금강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처럼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수행자의 삶에서나 일상인의 삶에서 과연 그러한 모습들이 어떻게 구현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겠습니다. 내 개인적인 견해라면, 지난 편지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방편바라밀을 거쳐서만 진정한 무심의 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행의 면에서도 ‘묵조선’이라고 하는, 모든 지각 활동을
쉬어버린 목석과 같은 죽은 수행보다는 분심, 의심, 신심*1 이
 
라는 활화산 같은 뜨거운 구도심을 토대로 한 방편바라밀로서의 간화선(看話禪, 화두선)이 무엇보다 존중되어야 할터이고, 일상적인 불교인의 삶의 태도도 지금처럼 침묵만을 지키고 무기력하고 무비판적이고 비창조적인 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역사적인 방편바라밀을 구현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무심’의 가문침이 잘못 길들어지기는 비단 불가(佛家)의 수행자뿐만이 아니라 사회 속의 많은 생활인들도 그야말로 무심결에 길들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불교의 수행에서 보이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역사의 메카니즘에 비추어 살펴 볼일이라 생각됩니다.
사제님도 아시다시피, 오늘날 사회는 후기 산업사회라 하여 첨단과학의 시대이며, 정보화 시대이기도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의 체제로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크게 나뉜 가운데 수정과 변형을 이루어가고 있읍니다. 더우기 오늘 이땅의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얼키고 설킴의 부산물로서 분단이라는 왜곡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깨달음이 오늘의 우리의 삶을 설명하는, 삶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얻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관계와 변화를 통찰하는 데에서 가능하리라 봅니다.
존재의 관계와 변화를 이해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무엇보다 냉엄하면서도 이성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특정한 종교의 교리나 어떤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서
도 아니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올바른 무심의 태도가
요망되는데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갖가지 오락과 퇴폐 문화
로 사람들의 귀와 눈을 마비시키고 도착되도록 만들고 있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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